akive

검색
친구에게 알려주세요.
me2day facebook






2010년한국의 봄은 파란만장했다. 천안함이라 이름 붙은 해군의 군함이 서해바다에서 침몰되고 희생자들의 이름이 전사자의 명단에 올랐으며 온 국민의 애도 속에 장례가 치러졌다. 한국은 전 세계에서 마지막 남은 분단국가이다. 이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하지만 오랜 시간 동안 변함없는 사실이란 대개 주목 받기 어렵기 마련이다. 한국전쟁은 발발 한지 60년이 흘렀고 휴전상태로 벌써57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길고 긴 시간이 지난 분단의 현실이 한국 국민 개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이란 미미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전쟁이 멀리 있는 것만도 아니다. 한국 국적의 남성은 누구나 의무적으로 군대에 가야하며, 흔히 군대를 다녀와야 진정한 남자가 된다고 한다. 대한민국의 여성은 누구나 한번쯤 군대 가는 남자친구나 남동생이나 아들 때문에 눈물을 찍어내는 경험을 하곤 한다. 끝나지 않은 전쟁, 멈춰진 전쟁은 특별한 사건과 평범한 일상의 모습으로 여전히 한반도에서 현재진행형인 것이다.

예술이 예술가라는 예민한 사람들의 일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측면에서, 한국의 예술가들이 분단의 현실이나 군대, 또는 북한과 관련된 소재들을 적극적으로 다루지 않는 것은 일면 의아스러운 일이다. 술자리의 안주거리로 군대 시절의 경험을 무용담처럼 늘어놓는 것은 쉬워도, 예술의 소재로 삼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두 세대에 걸쳐 한국인을 지배하게 된 집단 무의식적 금기의 작용이 아닐까 싶다. 북한이 하나의 국가로서 기능하고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우리에게 불편한 현실이다. 남한과 북한은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을 나누어 갖은 주적主敵 관계에 있고, 결코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이웃이며, 동족으로 시작해서 원수가 된 불편한 사이이기 때문이다. 휴전선이 어떠한 벽보다도 견고한 장벽의 기능을 하던 냉전시대에 초등교육을 받은 남한 사람들은 김일성이 한 나라의 지도자이며 머리에 뿔이 달린 돼지 형상을 한 괴물이 아닌 사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심리적 충격을 통해 어른이 되었다. 남한과 북한은 모두 자국의 체제 안정을 위해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또한 유래 없이 폐쇄적인 외교정책을 고집해온 북한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구체적인 경험을 차단시켰다. 그 결과 남한 사람 개개인에게 있어서 북한과 대치하는 군대의 경험은 구체적인 현실이지만, 막상 북한은 지극히 이념적인 현실이 되었다. 존재하지 않는 현실인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은 모호하고 다중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한 측면에서 백승우의<블로우 업>과<유토피아> 연작은 북한을 소재로 하였다는 사실만으로도 출발부터 우리의 불안을 건드린다. 한국 사회에서 폭력이나 외설 또는 종교보다 더 조심스러운 이슈는 ‘분단’인 것이다.


백승우는 현실과 비현실, 혹은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고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들이 섞여진 장면에 대한 관심을 작업의 뼈대로 삼아 왔다. 눈에 보이는 것을 현실이라고 믿는 세상에 살면서 현실과 뒤엉켜 있는 비현실의 조각들을 찾아내는 것, 그 결과 우리가 믿고 있는 현실의 기반이 얼마나 취약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작업을 해온 것이다. 그의 전작<리얼 월드I>은 전 세계의 유명 지형지물들을 모형으로 설치한 공원에서 그것이 꾸며진 가짜임을 알아챌 수 있는 단서들과 함께 보여주는 것이었다. 현실이 아님을 숨기지 않는 비현실은 그의 사진에서 어엿한 현실의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대형 카메라를 이용해서 충분한 디테일을 부여하고 대형 인화로 완성한 그의 작품은 우리 시대, 우리 사회가 무엇을 현실이라고 믿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며 동시에 백승우 식의 해답이었던 것이다.
 
<리얼 월드II>는 평온한 현실 공간의 질서를 깨는 병사 모형을 등장시킴으로써 다시 한번 비현실적 요소를 중첩시켰다. 어두운 밤 골목길이나 담장에서 무언가 은밀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듯한 작은 병사들 역시 굳이 가짜임을 숨기지 않는다. 작가가 피사체의 상대적 스케일을 조작하지 않았기 때문에 병정이 가짜라는 사실을 알아채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그 결과 오히려 보는 사람이 그 장면의 당위성을 탐색하는 임무를 떠맡게 된다. 우리는 모든 경험과 기억을 동원해서 그들이 그 장소에 있어야 할 법한 해답을 찾으려 한다. 이 연작의 시간적 배경이 된 ‘밤’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 마법의 시간으로 현실을 전복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백승우의 작업이 지니는 묘미는 ‘시각적 세계의 허구성을 시각매체를 통해서 일깨운다’는 면에 있다. 이것은 현대 예술의 맥락에서 사진이 지금과 같이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 이유와 맞닿아 있으며, 백승우가 자신의 작업에 사진을 활용하는 확고한 근거이기도 할 것이다. 사진은 오랜 시간 동안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반영하는 도구로서 군림해 왔고, 지금도 자주 현실을 대신하는 도구로 활용된다. 증명의 기능을 앞세운 사진들은 우리의 현실을 떠받치고 있는 근간이 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지로 대체된 현실의 허구성에 대한 지적 역시 그만큼 해묵은 예술의 주제가 되어왔다.
사진이 현실로부터 비롯된 것이면서 동시에 허구일 수 있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개입되기 때문이다. 모든 사진 이미지는 찍은 사람의 선택에 의해 간추려진 현실이다. 선택은 일반적으로 주체로서의 작가, 즉 보여주기의 방식을 주도하는 자에 의해 행해진다. 그리고 사회가 성숙하고 다양성을 띌 수록 선택의 자유를 누리는 자는 많아진다. 북한 사회의 특수성은 모든 선택의 권한이 정치권력에 의해 편중되어 있는 경직성으로 대변된다. 불특정 다수에게 분산되지 않은 권한이란 그것을 행사할 수 있는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힘을 발휘하게 마련이다. 사진가가 북한을 방문할 기회를 얻게 되면 흔히 남들은 보지 못한 특별한 세계를 목격하게 될 것이란 기대에 부풀게 된다. 그러나 막상 금단의 땅에서 철저하게 지켜지고 있는 규칙 앞에서 좌절하고 나면 그곳에서 자신의 역할은 아무 것도 없다고 쉽게 포기하게 된다. 백승우도 그런 좌절을 경험했다. 하지만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그것이 ‘선택의 권한’에 관한 문제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만의 권한을 행사하기로 결심하였다.
<블로우 업>은 정치권력에 의해 재단된 북한의 현실 가운데서 숨겨진 것을 드러내는 작업이다. 작가는 북한당국에 의해 검열되고 잘려나간 필름들 사이에서 그들이 숨기고 싶어 했던 모습을 찾아내서 확대하였다. 연작의 제목이면서 제작기법인 ‘블로우 업’을 통해서 우리는 볼 수 없었던 것, 보기를 허락 받지 않은 것을 보게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선택의 권한은 ‘규칙(혹은 권력)’에서 ‘작가’에게로 이양되었다.


<블로우 업>은 우리가 보고 싶었던 것을 보여주었다기보다는 그들이 보여주길 원치 않았던 것을 보여준다. 뭐 그리 대단히 숨길만한 것도 아닐 것 같은 영문 상표나 여승무원, 길 위의 행인들은 선택되어 확대되는 순간 북한의 검열을 뚫고 살아남은 귀중한 정보가 되었다. 이 과정은 위장된 현실보다 훨씬 더 정교하게 조직된 무의식의 세계의 논리(혹은 비논리)를 따른다. 모든 것은 미심쩍어 보인다. 불안정하게 꾸며진 현실의 틈새를 비집고 올라오는 정보들을 제대로 잡아낼 수 있는 현실의 잣대는 어디에도 없다. 정답은 없는 것이다. 다만 감각적으로 촉수를 세워 조금이라도 더 진정한 현실에 가까운 것을 보여주고자 할 뿐이다. 우리의 불안은 우리가 누구와 싸우고 있는지를 모를 때 극대화된다. 어디까지가 숨겨진 것이고 어디까지가 보여진 것인지, 어디까지가 꾸며진 것이고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검열되어야만 하는 규칙 때문에 잘려나간 필름들, 수집되어야만 하는 규칙 때문에 수집된 비밀들은 과연 검열을 통과하거나 수집되지 않은 정보들보다 가치 있는 것인가? 작가가<블로우 업>에서 보여주는 정보들은 카메라에 의해 기계적으로 기록되었다는 면에서 현실이지만 새로운 주체에 의해 선택되고 확대되는 과정을 통해서만 현실의 지위를 부여 받을 수 있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우리가 백승우를 통해서 보게 된 장면 역시 가능한 선택지들 중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그가 한 달 동안 평양에 머물면서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것이 그가 행한 선택의 준거가 되었을 것이다. 이 얼마나 잘 조직된 무의식 활동의 결과인가?



위장된 현실은 현실이 아니듯이 조직된 무의식은 무의식이 아니다. 백승우가 진정 그의 감각을 모두 동원해서 폭로하고 싶었던 것은 숨겨진 어떤 것이 아니라 ‘조작’과 ‘은폐’ 그 자체였던 것이다. 하루 종일 조깅을 하는 임무를 띤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을 감시자의 모습과 중첩시키고, 제복을 입고 교통정리를 하는 여인을 텅 빈 거리와 중첩시키고, 도무지 손님이라곤 없을 것 같은 상점을 그 앞을 두리번거리며 지나가는 행인들과 중첩시킴으로써, 현실이 어떻게 조작되고 은폐되었는지를 폭로한 것이다.
백승우는 모호한 현실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명료한 대답을 선호한다. 그의 작업은 은근 슬쩍 내미는 질문이 아니라 까칠하게 내지르는 선언이다. 그의 태도가 시니컬하게 보이는 것은 관찰자와 피 관찰자의 시선이 결코 뒤섞이지 않는 것에서 기인한다. 사진 속의 인물들은 관찰자인 작가와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시선의 교류가 없다는 것은 각자가 자신의 역할에 몰입해 있을 뿐 상호교감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피 관찰자 들이 연기에 몰두하고 있다면 관찰자는 오직 그들의 외양이 얼마나 가식적인 것인가를 밝히는 일에만 집중해 있다. 관찰자와 피 관찰자의 시선의 흐름이 경직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관찰자의 시점에 붙들려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백승우의 사진 속에서 블로우 업 된 장면 --한 곳에서 찍어낸 듯한 머리 수건과 모자를 쓴 사람들의 뒷모습, 양산으로 가려진 얼굴들, 천편일률적인 표정의 아이들, 길에 서서 어딘가를 주시하는 사람들 -- 은 숨겨졌던 진실의 편린이 되어 시야의 표면으로 선명하게 떠올랐다. 따라서 우리는 그가 제시하는 분명한 답에 따라 북한 사회가 지닌 허구성에 대해 의심 없이 동조하게 된다.
 
<유토피아>에서 작가의 권능은 더 강력해 진다. 실재하는 사물을 좀 더 면밀히 살펴보기 위한 수단으로 사진을 활용하는 단계를 넘어, 은폐와 조작의 의도에 부합하는 모습으로 사물을 가공하기 시작했다. 북한이 첨단의 건물과 시설들을 선전선동에 활용하기 위해 촬영한 사진을 구해서 자신의 상상을 덧붙여 임의로 변형시키는 작업을 한 것이다. 건물들은 극적으로 높아지거나 웅장함이 강조되는 형태로 변형되었으며, 배경에는 다채로운 색이 입혀졌다. 은폐와 조작을 폭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가담함으로써, ‘무엇이 허구인가?’ 를 묻는 대신에 ‘이것이 허구이다’. 라고 내미는 것이다. 하지만 때론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실재하는 것보다 진실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유토피아란 본래 그런 것이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지고 선택된 장면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과 본질적으로 맞닿아 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아파트, 환자가 없는 수술 방, 제품을 생산하지 않는 공장, 훈련을 하지 않는 전투기는 모두 보여주기 위해 꾸며진 것이기 때문에 이상적인 것일 수 있다. 작가가 가한 모든 조작은 바로 이 꾸밈이 지닌 이상적 면모를 극대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특히 음울한 흑백 사진에 부분적으로 입혀진 컬러는 피사체를 현실로부터 유리시키면서 이것이 조작된 이미지라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얼핏 보면 고명도와 고채도의 색이 경쾌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20세기 공산주의의 전형적인 선전선동용 인쇄물에 등장하는 컬러를 차용해서 모든 조작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음을 밝혀둔 것이다.
 
백승우는<유토피아>에서 이미지의 형태와 색을 변형시키는 가장 기본적인 전략을 구사했다. 회화로부터 디지털 아트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미지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시각구성 요소들을 변화시킴으로써 지극히 중립적인 이미지에 작가의 관점을 불어넣은 것이다. 이것은 그의 관심사가 북한이라는 소재에 국한되어 있지 않음을 상기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북한은 꾸며진 것에 대한 상징일 뿐 그의 궁극적인 관심사는 아니다. 흥분된 눈으로 북한을 들여다보던<블로우 업>에서 와는 달리<유토피아>에서 그는 한발 물러서는 태도를 보인다. <유토피아>에서 작가는 자신이 한국인이며 북한의 적국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걷어내고 좀 더 근본적인 질문에 다가서고자 하였다.
‘꾸며진 실재와 과장된 실재 중 무엇이 더 현실, 혹은 비현실에 가까운가?’
 
백승우의 태도가 여유로워진 만큼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우리를 향해 열려있다. 인류는 시각에 대한 강박에 의존해서 세상을 만들어 왔다. 눈의 역사가 곧 미의 역사이며 인식의 역사인 것이다. 한번 더 나의 눈을 믿어볼 것인가, 또는 꾸며진 모든 것을 조롱할 것인가는 철저하게 나의 선택에 달린 문제이다. 백승우의 작업이 우리에게 일깨우고 있는 것은 바로 그 ‘감각적 자율성의 회복’인지도 모르겠다.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을 의심하는 것과 속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 중 어느 편을 선택할 것이냐는 관람객인 우리에게 주어진 마지막 특권이다.

신수진 / 사진심리학 박사


여러분 이 작가에 대해 더 알고 싶으세요? 작가정보 페이지 이동
친구에게 알려주세요.
me2day facebook

댓글(1)

현재 0byte/ 최대 500 byte

등록
rlaxogml 음..왠지 모를 공허함이 있네요.. 2010.10.01 16:24:07

Quick Page Up